안철수 어떻게 카이스트 교수가 되었나
View 19,682 | 작성일2016.01.0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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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어떻게 카이스트 교수가 되었나
기부금 낸 정문술, 안철수를 교수로 추천하다
모세원 전 목포대 교수/ 전 민주당국가전략연구소장
카이스트에 기부금 낸 정문술, 안철수를 카이스트 교수로 추천하다
안철수는 우리사회가 가장 먼저 타기(唾棄)해야 할 갖가지 못된 짓거리를 도맡아 저질러왔다. 그를 부정과 비리, 그리고 특혜 백화점이라고 불러도 오히려 모자랄 지경이다. 그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면서부터 지금까지 그의 수많은 못된 행태가 밝혀졌고,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였다는 것도 알려졌다. 그러나 안철수와 그의 부인 김미경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 :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 Technology)의 교수가 되는 과정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돈의 위력으로 교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모든 언론 매체들이 일부러 눈감아 주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어 부득이 이 글을 쓴다.
미래산업 회장이라는 정문술이 2008년 3월 26일 안철수를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추천했다. 카이스트 측은 정문술이 자필로 서명한 아래와 같은 추천서를 받은 다음 날 ‘석좌교수임용규정’을 개정하여 5년이었던 초임계약기간을 아예 없앴다. 뿐만 아니라 카이스트는 정문술이 안철수를 추천하자 단 6일 만인 4월 1일 안철수 부인 김미경을 의과대학원 부교수로 전격 임용했다. 5월 1일에는 인사규정마저 개정하면서 당일 안철수를 ‘정문술 석좌기금 교수’로 채용했다. 추천 받은 지 35일 만에 초고속으로 이루어진 인사였다. 카이스트는 안철수를 ‘정문술 석좌교수’로 채용한 후 1개월 11일 만인 6월 11일에야 ‘정문술 석좌기금’을 설치했다. 앞뒤가 뒤바뀐 웃을 수도 없는 해프닝이었다.
안철수는 카이스트에서 3년 동안 근무하면서 논문 한 편도 쓰지 않고 2억9360만원의 급여만을 챙겼다. 뿐만 아니라 안철수는 학교에서 마련해준 30여 평짜리 아파트가 비좁다고 따로 50여 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하는 바람에 카이스트는 2억 가까운 자금을 추가로 지급해야 했다. 황당한 것은 그 급여와 추가 부담액이 ‘정문술 석좌기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모두 카이스트의 일반예산에서 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문술 석좌기금’은 이름뿐이었고, 애당초 ‘깡통기금’이었기 때문에 안철수에게 지급할 ‘열매’(예금이자)가 없었던 것이다(관계 직원의 말). 안철수와 정문술, 그리고 카이스트가 국민의 눈을 속이려고 벌린 지능적인 꼼수였다. 따라서 2011년 5월 안철수가 퇴임하자마자 명목뿐이었던 ‘정문술 석좌기금’은 카이스트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임용규정’과 ‘인사규정’을 개정하여 안철수를 정년보장 정교수로 채용한 것은 안철수만을 위한 위인설관(爲人設官)이고, 위인행개(爲人行改)였다. 이 모든 불법적인 특혜는 순전히 안철수 한 사람만을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카이스트는 불법과 비리를 서슴지 않는 염치(廉恥)를 모르는 불법집단으로 전락했다.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추 천 서(위에 게재된 사진)
안 철 수 교수
위 사람을 KAIST “정문술 석좌교수”로 추천합니다.
2008년 3월 26일
정 문 술 (자필서명)
2008.3.26
그렇다면 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국립 특수대학교’인 카이스트가 여느 작은 사립대나 전문대에서도 하지 않는, 할 수 조차 없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부정한 일을 서슴없이 해치웠을까?
기부금의 위력이 안철수 부부를 교수 만들었다
정문술의 추천을 받고 제출된 안철수의 이력서를 검토한 카이스트는 ‘석좌교수’로 임용할만한 경력이 턱 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인정할만한 연구실적도 전혀 없었고, 전공도 상치(相馳)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안철수의 교수 경력은 1989년 9월부터 1991년 2월까지 1년 5개월 동안 1988년 3월에 신설된 단국대학의 이공대학 의예과(89. 10 의과대학 의학과로 개편) 전임강사를 지낸 것이 전부다.
안철수는 서울대 의과대학 석·박사 졸업논문 2편 외에 3편의 논문을 썼다. 석사·박사 논문은 필수적인 것이고, 교수 채용 때에는 이것 외의 다른 논문을 실적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3편의 논문 모두 공교롭게도 1993년에 씌어졌는데, 당시는 안철수가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 중이었다(엄정하게 병역법을 적용한다면 안철수는 군 복무를 다시 해야 한다. 가수 사이는 병역특례 혜택으로 어느 IT회사 복무 중 공연투어를 하는 등 부실한 복무를 했다는 혐의로 군에 재 입대하였고 제대할 때는 육군참모총장 상까지 받았다).
그나마 그 논문들이 남의 논문을 베낀 것이었거나, 남의 논문에 공동저자라는 허울로 이름을 슬쩍 끼워 넣은 것이었다(안철수 논문 표절에 관한 기사는 많다). 안철수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때 융대원 홈페이지 자신의 프로필에 총 3편의 논문을 게재했었다가 표절의혹이 제기되자 슬그머니 모두 삭제했다.
안철수는 1991년 서울대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한 후 91년 2월부터 94년 4월까지 해군 의무장교로 복무 했다. 복무기간 3년 2개월 동안 안철수는 서울에서만 2년을 근무했다. 제대 후 97년 5월 펜실베이니아 공과대학에서 공학석사(기술경영 전공<안철수는 M.S.E.라고 이력서에 쓰고 있으나, Ex.M.S.E.인 것으로 밝혀졌다>) 학위를 받았고, 2008년 5월에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기업경영 전공<안철수는 E.M.B.A.를 다니고도 M.B.A.라고 거짓말을 했다>)과정을 졸업했다. 그런데 안철수는 논문 자체가 없었기 때문인지, 내용이 부실한 것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학석사 논문도, 경영학 석사 논문도 공개한 적이 없다.
공학석사(M.S.E.)나 경영학 석사M.B.A.)앞에 붙은 ‘E’라는 약자는 ‘Executive(중역)’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기업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단기 교육 프로그램이다. 고급호텔에서 숙박하면서 동급생들끼리 어울려 사교를 즐기며 주말에만 수업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안철수가 존경해 마지않는 정봉주(전 민주통합당 의원) 펜클럽 카페인 ‘정봉주와 미래’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안 후보가 이수했다고 한 경영학 석사과정은 풀타임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 경영학 석사)가 아니라 일주일에 토요일, 일요일, 두 번만 수업하는 최고경영자들을 위한 Executive 즉 EMBA과정이다.”
이런 정도의 학력으로는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되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논문도 없는 공학 석사와 경영학 석사는 학력으로 인정될 수가 없다는 것은 안철수 자신은 물론 대학 초급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다. 실력이 모자라 의학 강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처지였던 안철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의학을 전공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의학 관련 논문이란 것이 남의 논문을 표절하거나, 공동저자로 어물쩍 이름을 올려놓은 그로서는 자신이 ‘깡통’임이 강의 첫 시간에 들통 날 의학교수가 되겠다고 선뜻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철수가 택한 교과목이란 것이 여기저기 잡문(雜文)에서 주워 모은 이야기들을 입담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 ‘기업가적 사고방식’이요 ‘기업가 정신’이었다. 이 교과목은 ‘생명공학과 나노기술을 접목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 ‘정문술 기부금’의 취지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카이스트는 고심 끝에 편법으로 안철수를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로 발령했다.
카이스트, 안철수만을 위한 ‘정문술 석좌기금’ 신설
‘카이스트 교수임용 규정’에는 석좌교수로 임용하려면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술지에 국내외 논문 60편 이상을 발표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세계 조직공학재생의학회’로부터 최고의 영예인 ‘펠로(碩學)’에 선임된 전북대학 강길선 교수처럼, 외국에서 석학으로 인정받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에 준하는 실적을 쌓아야 된다는 지침이다. 서울대 자연대 김빛내리 교수는 2010년 중견석좌교수로 임명되었고, 한국에서 노벨상을 받을 만한 우수한 학자로 평가된다. 김 교수는 Cell, Science, Nature 등에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겨우 논문 세편에, 그것마저도 남의 논문을 훔친 안철수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경력과 학력을 가진 안철수를 석좌교수로 채용하기에는 낯이 뜨거웠든지 카이스트는 고뇌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편법으로 ‘정문술 석좌기금’이라는 것을 설립하여 안철수를 이 기금의 혜택을 받는 ‘정문술 석좌교수’로 채용하기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식 채용심사과정은 당연히 생략되었던 것이다.
국정감사(2012.10.19)에서 “안철수는 석학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논문도 본 적 없다”고 심경을 토로한 서남표 총장이 안철수를 채용할 때 얼마나 고심했을까. 그러나 카이스트의 이런 고충을 십분 이해한다고 하드라도 안철수의 교수 임용은 경력과 실적, 그리고 전공 상치를 모두 외면한 비난 받아 마땅한 옳지 못한 처사였다.
여기서 정문술이라는 사람이 누구인데 그의 추천서 한 장으로 전임강사 자격도 부족한 안철수를 석좌교수로 채용할 수 있었느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정문술, 카이스트에 발전기금 300억 원 기부
정문술은 2001년 5월 7일 “국민을 먹여 살릴 기술과 인력을 양성해 달라”면서 카이스트에 300억 원을 기부했다. 그는 “소유하면 잠시 동안 내 것이지만, 기부하게 되면 영원히 내 것이 된다. 기부는 소유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카이스트는 이 기부금으로 생명공학과 나노기술이 접목된 기술개발과 인재양성에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기부금 중 110억 원을 들여 ‘정문술 빌딩’을 신축했다.
정문술은 18년 동안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다 부이사관으로 1980년에 퇴임했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기둥사장으로 실패의 쓴맛을 톡톡히 맛보았다. 그러다 1983년 반도체 장비회사인 미래산업을 창업하여 고졸과 전문대를 종업한 기술자들만으로 ‘테스트 핸들러’라는 반도체 검사장비를 개발하여 코스닥에 상장시키는 실적을 올렸다. 1999년에는 국내기업 최초로 나스닥에 상장시키면서 ‘벤처산업의 대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2001년 1월 4일 긴급이사회를 소집하여 ‘세습을 배제한다’는 소신에 따라 인척관계가 전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그에게는 ‘거꾸로 경영’, ‘아름다운 경영’의 달인(達人)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정문술은 안철수의 ‘정신적 대부’요 ‘멘토’다
이 대목에서 정문술은 어떤 이유로, 또 어떤 의도로 안철수를 카이스트 교수로 채용해달라고 했을까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조용한 방안에서는 난데없이 구름이 생길 수가 없기(房中難起雲)’때문이고,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가 없기’까닭이다. 어떤 작위(作爲)적인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린내가 풍기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안철수와 정문술은 2000년 3월 14일 조용한 음식점에서 배석자 없이 점심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벤처기업을 하면서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나 두 시간 가량 기업경영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정문술 : “기업가는 돈에 대한 콘트롤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안철수 : “돈 위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사람 위에 돈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문술 : “돈은 사람을 추악하게 만듭니다. 사업에서 퇴장할 때는 돈을 극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안철수 : “회사 돈을 사적으로 쓰지 않는 것도 좋겠어요.”
정문술 : “ 창투사 등에 투자하여 돈놀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안철수 : “옳은 말씀입니다.”
정문술 : “기업의 주인은 사장이 아니라 직원이에요.”
안철수 : “저도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인척은 내 회사에서는 절대로 고용하지 않겠습니다.”
정문술 : “참으로 좋은 생각이요. 우리가 재벌들의 못된 짓거리를 흉내 내서야 되겠어요!”
안철수 : “참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안철수, 정문술에게 석좌교수 청탁
첫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수시로 만났다. 2008년 초 안철수는 정문술에게 카이스트 석좌교수를 시켜달라고 졸랐다. 그 때 안철수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와튼스쿨 EMBA 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정문술은 교수 채용 과정을 자세히 모르는 터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안철수는 당신이 카이스트에 300억 원이라는 막대한 기부금을 냈으므로 당신 말을 카이스트에서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카이스트에 추천서를 제출하면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안철수는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다짐하기를 잊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정문술은 카이스트에 안철수 추천서를 제출하면서 총장에게도 간곡히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이스트 측은 즉시 안철수에게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통지했으며, 안철수는 부부가 떨어져서는 생활 할 수 없다는 핑계로 부인 김미경도 교수시켜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카이스트 측은 자격 없는 안철수를 석좌교수로 받아들이기로 한 마당에 그의 부인 김미경을 교수로 채용하는 일은 가볍게 생각하여 심사절차를 전혀 거치지도 않고 안철수보다 1개월이나 먼저 김미경을 부교수로 임용했던 것이다. 부교수로 임용된 김미경은 성균관대학에서 2년 6개월 동안은 일반 의사로, 3년 6개월은 조교수로, 1년 7개월은 부교수로 재직했으면서도 카이스트에 제출한 이력서에 성균관대학에서 7년 11개월 동안 부교수로 재직했다고 기재했다. 서남표 총장은 “그것은 허위기재라고 할 수 있다”(국정감사)고 확언했다.
한 마디로 안철수 부부가 카이스트 교수가 된 것은 카이스트에 기부금을 낸 정문술의 입김으로 된 것이고, 정문술은 그가 낸 기부금의 위력에 힘입어 카이스트에 압력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안철수 부부는 돈의 위력으로 카이스트 교수가 된 것이다. 돈으로 카이스트 교수직을 샀다는 말이다. 어느 대학이나 기부자의 영향력은 절대로 무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총장의 제일로 꼽히는 능력이 ‘발전기금 다량확보’이기 때문이다.
귀신 뺨치게 영악한 안철수는 이러한 상황을 십분 이용한 것이고, 그 보답으로 정문술이 미래산업의 주가를 최대한 끌어 올리는 공작을 마무리 할 때까지 대통령 출마발표를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이다. 안철수가 정문술을 ‘존경하는 나의 대부요 멘토’라고 공공연히 추켜올림으로써 미래산업은 ‘안철수 테마주’로 분류 되었고,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2008년 초까지 300원대에 머물던 주가는 안철수가 곧 출마선언을 하겠다고 예고한 시점을 전후한 9월 13일에는 2075원으로 급등했다. 그 결과 정문술과 그 부인 양분순은 안철수가 대선 출마선언을 하기 5일전인 9월 14일일 주식을 전량 매각하여 411억 원이라는 거금을 벌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든가.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른 안철수와 정문술은 죽이 척척 맞는 스승과 제자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자기들만이 가장 정직하고, 가장 선량하며, 가장 깨끗한 척하면서 뒷구멍에서는 갖은 쓰레기 같은 짓거리만을 일삼는 이런 곤충류(昆蟲類)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自愧感)을 떨쳐버릴 수 없는 오늘이다.
2012. 11 07 모세원 전 목포대 교수/ 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장/ 전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자 http://allinkorea.net/
편집인 주: 미국에서는 기부금을 낸 사람이 학문의 분야에 대해서는 지목할 수 있지만, 교수를 절대로 지목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2000년 초반에 예일대학에서 한 기부자가 약 2천만불을 냈는데, 서양역사에 관한 학문을 위한 목적으로 기부하면서 교수를 지목했다고, 예일대학이 그 기부금 2천만불을 다시 기부자에게 되돌려줬다고 전 세계의 동문들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필자도 그 편지를 예일대학으로부터 받고, 기부문화의 깨끗함에 감격한 적이 있다. 그만큼 기부자와 교수는 분리시키는 것이 서양의 기부문화다. 기부금을 내고 그 댓가로 특정 교수를 추천한 정문술은 그런 점에서는 실패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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